21세기에 벌어지는 늑약(勒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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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벌어지는 늑약(勒約).
  • 임승환 기자
  • 승인 2019.05.15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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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환 영남취재본부장.

[신한일보=임승환 기자] 억지로 강제해 맺은 조약을 늑약(勒約)이라고 한다. 조약을 포함한 법률행위는 당사자, 목적, 절차, 결과가 모두 정당성을 지녀야 합법적인 효력을 지닌다. 

1905년 11월 17일에 있었던 을사조약과 1910년 8월 22일에 있었던 한일합병조약(경술조약)은 조약 당사자, 목적, 절차, 등에 하자(瑕疵)가 있었기 때문에 조약(條約)이라 하지 않고 을사늑약, 경술늑약이라고 한다.

경술늑약의 출발점은 고종황제의 양위식 이었다. 1907년 7월 20일, 고종은 헤이그밀사사건에 관련되었다하여 일제에 의해 강제로 순종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다. 더욱이 그날의 양위식 에는 고종황제와 순종황제가 직접 참여하지 않고 두 명의 내관들이 대신 참여하였다. 

고종과 순종이 강제양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식절차가 필요했던 일본은 그 가짜 양위식으로부터 38일이 지난 1907년 8월 27일, 경술국적(庚戌國賊) 8인(이완용, 윤덕영, 민병석, 고영희, 박제순, 조중응, 이병무, 조민희)을 앞세우고 덕수궁 돈덕전(惇德殿)에서 공식적으로 순종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1910년 8월 22일 결국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이 조인되고 7일 후인 8월 29일 공식적으로 공포되었다.

원천적으로 무효인 그 경술늑약을 두고 상당수의 지방자치단체들이 나라를 빼앗긴 날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조기(弔旗)를 다는 조례를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고 한다. 

추모제를 지내는 것과 조기를 다는 것은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현충일 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을 추모하고 명복을 비는 의미에서 조기를 다는 경우는 있어도 망한 나라를 추모하여 조기를 다는 국가는 없다. 

조기는 영원히 저승에서 영면하라는 뜻이 아닌가? 백번을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보란 듯이 세세연연(歲歲年年)이어가야할 나라를 저승에서 영면하라니, 그게 말이나 될 법한가? 이는 일제가 강제한 무효조약을 유효로 만들어주는 동시에 대한제국이 망했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공식화하는 아둔함의 극치가 아닐까?

나라마다 국호는 바뀔 수 있어도 국맥은 바뀔 수 없다. 한국인이 마음속으로 가지고 있는 국맥은 지난 수 천 년 동안 결코 망한 적도, 죽은 적도 없다. 

고조선시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살았던 조상들이나 지금의 대한민국 국민인 우리들이나 마음속으로는 똑같은 단군의 자손으로서 동일한 국맥을 이어온 동일한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세계 모든 나라가 동일하다. 영국국민들이 과거 대영제국은 망했기 때문에 그들은 현재의 영국국민일 뿐이라고 생각할까? 독일국민들, 이태리 국민들, 프랑스국민들, 중국국민들, 일본국민들이 그렇게 생각할까? 모든 나라의 국민들은 국호만 바뀌었지 같은 국맥을 이어온 같은 나라에 살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국민들의 마음속에 있는 나라는 망하지도 죽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라가 망했다고 추모하는 조기를 달다니, 정말 제정신 가진 자들이 하는 일인가?

식민지 국민들이 폭동을 일으킬 때마다 지배국의 국기를 화형(火刑)하는 이유는 자기들을 지배하고 있는 원수의 지배국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배국이 죽어 없어져 영원히 저승에 묻히길 바라는 의미에서 지배국의 조기를 달수는 있다. 그러나 인류역사상 자기나라가 죽어 영원히 저승에 묻히길 바라면서 조기를 단 국가가 있었던가? 나라를 강탈당한 날을 잊지 않으려면 태극기를 조기로 달 것이 아니라 반대로 원수의 일장기를 화형시키고 조기를 달아야 하지 않을까?

자기나라가 망했는데 두 번 다시 깨어나지 말고 저승에 묻혀 영원히 잠들라는 조기를 달다니, 이런 멍청한 짓도 애국일까? 중앙정부마저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않고 있는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까? 국제적으로 나라와 국민을 망신시키는 이런 멍청한 짓은 당장 그만 두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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